"영접의 의미"
The Meaning of Acceptance 
요한복음 13:12-20







지난 주 마지막 만찬석상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주님이 오늘 본문에서는 그 의미를 친히 설명해주십니다. 또한 유다의 배신에 대한 지적도 반복하십니다. 과연 이 두 사건이 어떻게 연결되며 그 통일된 가르침이 무엇일까 하는 것이 제 의문이고 고민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전혀 상관없는 두 주제가 어떻게 상관성이 있을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 문제가 주님을 영접하는 것의 문제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세 가지 일이 중층적으로 발생한 것입니다.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가룟 유다의 배신을 말씀하시며, 그리고 주님을 영접하는 것이 주님을 보내신 자를 영접한다는 가르침입니다. 이 세 사건의 통일성이 무엇일까요?

첫째,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사건이 갖는 의미는 서로 발을 씻기는 아름다운 섬김의 모범을 보이신 것입니다. 이는 말보다는 솔선수범의 실천의 모범을 보이심으로써 제자들 상호간의 아름다운 섬김을 가르치신 것입니다.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실천이 더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이는 말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문제를 예방할 수 있는 지혜입니다. 우리는 지도력과 권위를 말로 인해 잃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말 없는 실천이 더 효과적일 수 있습니다. 말로 가르치고 지적하기 보다는 직접 모범을 보이는 실천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습니다. 이는 실제적으로 성도의 교제에 있어서 실천의 중요성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옳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다고 하십니다. 옳을 뿐만 아니라, 복이랍니다. 이보다 더 확실한 증거는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의심할 수 없는 확실하고 보증 있는 것입니다. 이를 다시 뒤집으면 옳은 사람과 복이 있는 사람은 형제와 자매의 발을 씻기는 것과 같은 솔선수범의 모범을 보이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서로의 발을 씻기는 섬김은 자체가 복이요 옳은 것이라는 확실한 약속입니다.

둘째, 예수님의 섬김의 복, 그 사랑은 인간의 조건을 보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 때문에 가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것도 함께 떡을 뗀 자가 자신을 배신한다는 사실을 아셨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발까지 씻겨주셨습니다. 기독교의 사랑의 실천은 무엇 때문에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사랑이라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조건적인 사랑이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이처럼 무조건적인 사랑, 아가페의 사랑입니다. 이것이 지상의 어떠한 사랑과도 차별되는 사랑입니다. 모르고 당하는 것과 뻔히 알고도 당해주는 것은 질적인 차원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은 모든 인간적인 사랑과 노력이 끝난 그 다음부터 본격적으로 작동합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인간의 질적 차이입니다. 우리는 도저히 못하겠다고 포기하는 순간 하나님은 그것을 이루어 내십니다. 이성적으로 인간적으로 상식적으로 모든 이해와 노력이 끝난 순간 하나님의 사랑은 본격적으로 작용하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셋째, 다시 말해서, 그런 사랑을 믿을 수 있겠느냐? 그것을 가르치고 몸소 실천하는 나를 너희가 용납하고 영접할 수 있느냐?는 물음입니다. 세상에서 그런 바보와 멍청이는 없습니다. 당하는 사람이 바보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자신을 배신한 자와 함께 마지막까지 식사를 나누고, 그의 발을 씻기시는 예수님이 과연 제 정신입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머리에 총 맞지 않고서야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습니까? 더욱이 그런 예수님을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아로 인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팔레스틴의 가자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와의 갈등을 보면서 저들은 똑같이 위대한 메시아, 엄청난 권력을 가지고 행사하시는 절대 군주 이상의 영향력을 가진 초유의 지도자를 대망하는 어리섞음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잘못된 메시아에 대한 이상이 저들을 비극으로 몰고 갑니다. 진정한 메시아는 지금도 자신들의 총탄에 맞아 신음하고 죽어가는 사람들 속에 계신 줄 모르고 말입니다. 홀로 코스트의 현장 속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안네의 하나님은 어디 계십니까? 라고 절규하는 사람들 속에 하나님의 자리는 어디 입니까? 하나님이 진정 살아 계시다면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습니까? 여기까지가 인간이 물을 수 있는 최선의 물음이자 한계입니다. 그리고 더 이상은 알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정직한 한계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의 저자인 독일 신학자 위르겐 몰트만은 하나님의 무능만이 인류를 능히 구원하실 수 있다고 합니다. 이보다 앞서 디트리히 본회퍼는 무능한 하나님만이 진정으로 인간을 도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바울 역시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구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을 구해야 합니까? 그것은 바로 그 무능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을 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신할 제자의 발을 씻기시는 무능하신 예수를 우리는 영접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행위와 모점이 매력적으로 우리에게 다가와야 합니다. 진정한 가치와 의미로 우리 삶을 사로잡아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영접하며 용납하는  행위인 것입니다. 한 어린 아이를 영접한 것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라는 말씀을 명심해야 합니다. 원수조차 사랑할 수 있어야 우리는 진정으로 하나님을 영접한 자입니다.


*2009년 1월 18일 열린 교회 주일 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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